지난 글에 이어 두 번째 고흐에 대한 포스팅이다. 고흐의 이야기는 정말 많고 아쉽기도 하고 미스터리 한 부분도 있는데 오늘은 그의 죽음 관련 이야기도 함께 해보도록 하자
- 아를르의 포룸 광장의 카페테라스
- 빈센트 반 고흐 #2
- 죽음에 얽힌 음모론
아를르의 포룸 광장의 카페 테라스
많은 화가들을 포함한 예술가들이 프랑스에 모였다. 네덜란드 화가인 빈센트 반 고흐 역시도 그중 하나였다. 흔히 고흐에 인생에서 아를르의 시기라고 불려지는 때는 어찌 보면 고흐의 창작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고흐는 아를르의 포룸 광장에 자리한 야외 카페에서 작품을 그리는 시기에 밤에 작업하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현재에도 비슷한 곳을 그대로 볼 수 있는 곳이니 찾아보면 재미있을 것 같다. 그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인 색채나 형태에 구애받지 않고 개인의 감정 또는 피사체의 아름다움을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작품이다.
빈센트 반 고흐 #2
고흐가 보낸 곳을 따라가면서 소개해보려고 한다. 먼저 뉘넨 시절이다. 헤어짐을 겪은 고흐가 드렌테 남부에 와서 하숙을 하며 화가의 길을 모색하다 니암스테르담에까지 가게 된다. 당시 그는 유화라고는 해도 소묘와 비슷한 그림을 그렸다. 그 와중에 동생 테오가 구필 화랑을 떠나 미국으로 가서 독자적인 화랑을 세울까 하는 고민에 고흐는 흠칫 놀라고 결국 아버지가 이사한 뉘넨으로 옮겨가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뉘넨에서 고흐는 힘든 시기를 보냈지만 그곳에 정착할 마음으로 그림을 그렸다. 다행인지 테오가 미국을 가지 않고 구필화랑에 남아 고흐를 후원하게 되었고 그 사이 아버지는 뇌졸중으로 사망한다. 아버지 사망 후 창작활동이 많이 줄었고 여러 가지 이유로 뉘넨을 떠나 파리로 가게 된다. 파리에서는 일본의 영향을 받아 어두운 화풍에서 밝은 화풍으로 특성이 바뀌게 된다. 다만 곧 대도시에 염증을 느끼고 프랑스 시골 아를로 이동해 그림을 그리게 된다. 아를에 있는 시절은 그가 화가공동체를 만들었던 것이 가장 큰 이슈였을 것이다. 다만 그 제안에 응한 사람은 고갱 한 명뿐이었지만 말이다. 고갱은 고흐 동생 테오가 생활비를 대주니 너무 좋은 제안이었다. 다만 그들의 조마조마한 공동생활은 성격차이와 그림에 대한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결국 깨지고 말았다. 그 갈등에서 고흐가 귀를 잘라내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여러 가지 설들이 많긴 하지만 고흐의 귀가 잘린 것은 사실로 보인다. 그 후 그는 생레미로 가게 된다. 생레미는 요양을 결국 하기 위해 간 곳인데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불만이 폭발했고 힘들어했다. 생레미 요양원 퇴원 후에는 시골 오베르로 이동하였다. 오베르에서는 가셰박사(정신과 전문의)와 친분이 있었고 종종 작품을 그에게 그려줬다고 한다.
고흐는 1890년 결국 쇠약해진 몸과 정신을 이기지 못하고 권총으로 자살시도를 하게 된다. 그런데 실제 총알은 심장을 빗겨나갔지만 총알에 의한 감염으로 인해 이틀 만에 죽게 된다. 그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동생 테오 역시 6개월 뒤 정신병으로 형을 따라가게 된다. 그렇게 고흐는 생을 마감하게 된다.
죽음에 얽힌 음모론
여러 가지 음모론이 있는데 한번 보도록 하자. 하나는 고흐와 테오 형제가 매독으로 죽었다는 설이다. 당시 워낙 흔한 질병이었고 예술 가면 매독이다 할 정도로 이 병에 시달렸다고 한다. 다만 그 둘을 보았을 때 신빙성은 많이 떨어진다고 한다. 다음은 권총 자살이 아니라 살해당했다는 의견도 있다. 동네 청소년들에게 우발적으로 총을 맞았는데 소년들에게 죄가 생기는 것을 염려하여 자살한 것으로 가장했다는 주장이다. 다만, 이 의견을 주장한 박사는 총이 사라졌다 했지만 그 총은 발견되었다. 또 다른 연구가는 고갱이 고흐를 죽였다고 주장했다. 허무 맹랑한 이야기라서 넘어가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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