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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

별이 빛나는 밤 : 가난의 상징 빈센트 반 고흐

by 새로운출발2023 2023. 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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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30-40대 아니 50대까지 성인들이라면 기억하는 라디오가 있다. "별이 빛나는 밤에"라는 라디오 방송이고,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사람은 별밤지기라고 불리며 대부분 시대의 아이콘들이 그 역할을 하였다. 필자 역시도 학창 시절 라디오를 들으면서 그 작은 기계에서 나오는 이야기와 노래를 들으며 웃고 울고 했던 기억이 새록 떠오른다. 물론 한국에 국한된 이야기이고, 오늘은 가장 사랑을 많이 받고 사람들에게 기억이 많이 되는 고흐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정말 방대한 이야기가 있고 아는 내용도 많겠지만 고흐를 처음 찾아보는 후대의 사람들이 읽고 그를 공감하는 데에 도움이 되면 좋겠다. 오늘은 그의 삶과 가장 애정하는 그림인 별이 빛나는 밤에를 소개하려고 한다. 

 

  • 별이 빛나는 밤
  • 화가는 가난의 상징하는 직업
  • 빈센트 반고흐 #1

The Starry Night , Vincent van Gogh 1889

별이 빛나는 밤

 

아무것도 모른채 이 그림을 보면 표현이 꽤 독특하면서 한편으로는 어지러운 느낌마저 든다. 우리가 영화를 보다 보면 간혹 어지러운 현상을 표현할 때 비슷한 그림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당시 고흐의 마음이 거침없이 드러난 그림이라고 알려진 작품이 바로 별이 빛나는 밤이다. 당시 자신의 병을 인정하기 싫었던 고흐였기에 마음의 상태를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끝까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1889년 5월에 그는 동생 테오에게 편지를 쓴다. 생 레미에 있는 요양원에 가기로 했다고 말이다. 또한 입원을 하는 것이 본인에게 도움이 된다면 다른 고민 할 것 없이 진행해 보자고 이야기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의 고집스러운 마음이 어느 정도 누그러들고 진정된 상황임을 편지로 알 수 있었다. 자신이 평범하다고 믿고 있었지만 어느새 병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것을 인정하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은 겪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인이 미쳤다는 정신병을 순순히 인정한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아무래도 고흐 스스로 그림작업을 지속하더라도 그때의 불안한 마음이 더 나아지지 않을 것이라는 현실임을 본인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별이 빛나는 밤은 그런 그의 마음가짐이 거리낌 없이 드러난 작품이다. 물론 그림만 보아도 이게 행복과는 거리가 있는 작품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그림은 용양원의 창문을 통해 보이는 밤하늘을 그린 것이지만 실제를 보고 그린 것보다는 기억을 더듬어서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생 레미 병원으로 떠나기 전 아를에 머물 때 작품을 남겼다. 그 작품은 론 강에 비친 별빛이라는 작품인데 해당 작품을 그리며 고흐는 종교와 관련한 깊은 갈구를 드러냈다. 아무래도 현실이 너무 힘들기 때문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종교에 의지하고 싶은 마음은 이해할 수 있는 인간적인 번민일 것이다. 다시 작품이야기를 하자면 이 그림은 생 레미의 풍경과는 사뭇 다르다. 왜냐하면 오른쪽 산의 모습은 변형이 되어 있고 왼쪽에 불꽃모양으로 타오르는 사이프러스 나무도 고흐가 임의로 그려놓은 것이다. 보이는 전체적인 광경은 생 레미이지만, 현실은 실제 보이는 풍경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이 부분이 의미가 큰 것인데, 그는 인상파에 속해 있는 화가이다. 인상파의 이념에는 현실을 그대로 그린다는 전제가 있다. 그런데 이 작품을 보면 현실을 그리지 않았기에 고흐의 작품관은 인상파 이념을 벗어난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드러나는 풍경은 고흐의 내면세계가 고스란히 표현되어 있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행복하다 아름답다는 생각보다는 외로운 고독감과 불안감이 밀려온다. 이 작품은 고갱과의 다툼 후에 그려진 작품이다. 물론 다툼 후에 그 둘이 다시 본일은 없지만 그는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고갱의 안부를 묻고 있었고 종종 그를 생각한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고갱과 다툼으로 둘의 관계가 파국에 이르렀지만 여전히 되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남아있었다는 사실만으로 그는 고갱과의 고통스러운 면만큼이나 행복했던 기억들이 남아있었다고 여겨진다. 

 

화가는 가난의 상징

 

후대의 사람들은 고흐는 참 부자였을 것이다라고 자칫 오해를 할 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고흐를 모르는 사람을 찾는 게 더 힘들 정도이고, 그의 작품은 천문학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세상 가난해도 이렇게 가난한 사람이 있을까 싶은 화가가 바로 고흐였다. 화가를 비롯한 예술가들이 참 배가 고프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고 가난의 상징처럼 여겨진 것은 꽤나 오랫동안 그러했다. 요즘은 대중문화가 발달하고 예술계통이 주목을 받는 시대이지만 여전히 주목받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는 것이 이 분야이다. 솔직히 고흐는 살아생전에는 실패한 화가였다. 그가 살아있는 동안 그의 작품은 단 1개만 팔렸다. 팔린 그 작품은 아를의 붉은 포도밭이라는 작품인데 400프랑에 팔렸다고 한다. 더 재미있는 이야기는 돈이 워낙 없어서 그림을 팔았는데 그걸 산 고물상이 물감을 긁어내고 중고 캔버스로 팔았다는 이야기도 있고, 파리 카페 뒤에서 경매로 그림을 팔 때는 그의 그림 10장 가격이 커피 두 잔 가격이었다는 이야기, 치료한 의사에게 그림으로 값을 치렀는데 성의를 봐서 한 개만 받고 한 개는 거절했다는 이야기 등 놀라운 이야기가 많은데 한 가지 사실로 알려진 이야기가 있고 요즘 주목을 받고 있다. 그가 얼마나 가난했는지 캔버스 앞에만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니라 뒷면에도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그래서 최근에 그의 작품들의 뒷면에서도 그의 그림들이 발견되고 있다고 한다. 

 

빈센트 반고흐 #1

고흐의 인생을 살펴보면 그냥 행복하지가 않다. 마음이 아프면서 그가 얼마나 동생 테오에게 의지하고 그와 유대감을 갖고 있었는지를 느끼게 된다. 세상을 살 때에 행복해야하는데 죽고 나서 유명해지면 그게 무슨 소용인가라는 생각도 들지만 정말 제대로 이름을 남겼다. 고흐는 네덜란드 개혁교회를 하고 있는 목사 아버지에게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물론 그에게 형이 있었지만 그는 고흐가 태어나기 1년 전에 태어나자마자 죽었다. 그리고 동생들이 다섯 있었는데 둘째 동생이 테오이고 유명하다. 어린 시절의 고흐는 정말 평범한 아이였다. 많은 사람들은 고흐가 천재화가로 어린 시절부터 엄청난 실력을 보였을 것이다라고 오해할 수 있지만 어린 시절 고흐의 자질은 미술보다 곤충학자에 있었다. 여동생 중 한 명의 회고에 따르면 고흐는 모든 곤충 이름들을 알고 그것을 과학자만큼이나 집중하여 관찰했으며 꼼꼼하게 수집하고 분류했다고 전해지는데 그의 이런 관찰력이 많은 자연을 작품에 그려내게 된 것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그는 엄청난 독서광이었다고 한다. 신학과 문학을 많이 읽었고, 그의 인생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의 미술능력은 어머니에게서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흐는 11살부터 기숙학교 생활을 시작하고 프랑스어 영어를 본인 모국어인 네덜란드어만큼이나 했고 독일어도 꽤 능통하였다고 한다. 그 후 13세에 국립중학교로 진학하였는데 2년 뒤 갑작스럽게 자퇴를 하고 집으로 돌아간 것으로 나온다.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때에 고흐의 가족 내력인 정신병으로 일이 있어서 집에 돌아간 것이 아닌가 조심스레 추측을 해본다. 계속 그런 것은 아니라 집에 돌아온 후 나아진 뒤 아버지는 고흐를 학교에 보내자니 돈이 다시 들것이고, 집에 두는 것은 아닌 것 같아 그를 화랑에서 일을 시작하게 주선해 준다. 고흐의 큰 아버지 센트 의 주선으로 시작된 화랑 생활에서 고흐는 꽤 인정을 받았다. 당시 센트 삼촌은 꽤나 화상으로 성공한 사람이었고 구필이라는 화상과 동업으로 구필 화랑을 만들었는데 그에게는 자식이 없었기에 고흐와 테오를 너무나 친자식처럼 아꼈고 모든 것을 그에게 물려줄 마음까지 있었다. 다만 고흐는 화랑에서 일도 하고 있었고 유망한 화상의 길도 걸어가고 있었다. 어린 시절에는 고흐가 테오를 많이 도왔다고 한다. 당시 고흐에게 영향을 크게 미친 화가는 밀레였고 특히나 그의 이삭 줍는 사람들에 큰 감명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다만, 얼마 뒤 미술관점에서 손님들과 논쟁이 자주 벌어졌던 고흐는 화랑에서 해고가 된다고 알려져 있다. 실상은 런던으로 구필화랑의 지점을 내기 위해 파견을 간 고흐는 고도로 발전된 런던 도시에서 본 노동자들의 비참한 현실을 마주하게 되고, 하숙집 주인의 딸에게도 실연당하게 되면 정신증세도 동시에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특히 화랑에서 가치가 없는 그림이라도 말을 잘해서 팔아야 하는 생활방식이 그에게는 힘든 부분이었던 것 같다. 화랑을 그만두고 그는 종교에 빠져 가난한 이들을 종교로 돕고 싶어 했다. 그는 감리회 소속 목사를 만나 조수교사로 일을 하다고 고흐가 설교를 할 수 있도록 하게 된다. 그가 안정적으로 설교를 잘했다면 목사가 되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삶을 살 수 있었겠지만 그에게 조울증이 찾아왔고,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 그는 자연스럽게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고흐는 할아버지나 아버지처럼 목사가 되길 원했고 목사고시를 준비하였다. 나이가 이미 늦은 시기이지만 고흐를 돕기 위해 가족들이 나섰으나 고흐가 사랑에 빠지면서 정신적 혼란증세가 일어나고 시험준비도 망쳐버리고 말았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그를 선교단체의 전도사라도 되도록 도움을 주었고 정말 악명 높은 벨기에의 탄광지대로 파견을 가게 된다. 그곳에서 고흐는 광부들에게 헌신을 하고 노력하였지만 그의 정신상태가 온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선교단체에서는 그를 전도사로서 부적합하다는 보고를 하게 된다. 당연히 그는 해고되었고, 바로 성직자가 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성직보다는 미술 쪽에 재능이 피어나고 성직의 길을 떠나게 된다. 그의 화가생활은 브뤼셀에서 시작하게 된다. 당대는 미술아카데미를 가는 게 화가가 되는 일반적인 코스였지만 그는 독학으로 공부하는 것을 좋아했다. 당시 테오는 화상으로서 인정받고 승진하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고흐에게 파리 미술계의 불던 정보들을 알려주었으나 고흐는 이해를 늦게 하였다. 그 정보가 바로 인상주의나 종합주의 같은 새로운 미술 사조였다. 다행히 그것을 늦게 이해해 고흐 본인의 독특한 화풍이 생겨났다는 이야기도 있다. 고흐의 이야기는 내일 추가로 더 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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