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메두사호의 뗏목
- 낭만주의 미켈란젤로 카라바조까지 다 담았다
- 후대 낭만주의는 나만보면 된다 제리코
메두사호의 뗏목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화가인 테오도르 제리코의 작품이다. 당시는 신고전주의의 영향을 받는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고전주의의 영웅적인 서사를 담은게 아니라 당시 실제로 일어난 비극적인 사실을 다루고 있다. 1816년 세네갈을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떠난 해군 메두사 호가 난파를 당했다. 대부분 비극이 일어나면 윗사람은 참 잘 살아남는다. 메두사 호의 선장이나 상급 선원과 일부 승객은 구명정을 타고 대피를 했지만 그외 선원과 승객은 직접 뗏목을 만들어 타야하는 상황이었다. 물론 선장이 뗏목만 만들면 구명정으로 끌어주겠다고 했지만 막상 선장은 도망갔다. 대략 13일 정도 이 뗏목은 표류를 했고 물도 식량도 없던 이들은 지옥을 경험했다고 한다. 죽음은 물론이고 질병, 사람들은 미치고 기아와 탈수, 살기 위해 죽은 사람을 먹는 등이 그 지옥의 한면이겠다. 이 뗏목의 모두가 죽은 것은 아니다. 15명 정도가 살아남았고 이는 국가적인 이슈가 되었다. 사건을 조사한 결과 이는 20년동안 전쟁은 한번도 나가보지 못한 무능했던 왕당파가 지휘관이 되어 벌어진 인재였고, 당연히 정부는 이 사실을 은폐했으나 살아남은 생존자의 이야기가 출판되면서 모든 사실이 수면위로 드러났다. 제리코는 이 이야기에 매료되었고 이 사건을 철저히 조사하고 그림을 준비했다. 생존자 중 몇몇은 모델로 고용했으며 실제 크기의 뗏목을 제작하고 밀랍으로 모형까지 제작하였다. 죽은 사람들 표현을 위해서 시체안치소나 병원을 찾아가 죽어가는 사람, 죽은 사람의 몸 색상도 연구했고 정신병원을 찾아가 미친사람을 관찰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 그려진 그림이니 지금 보아도 리얼리티가 느껴진다.
낭만주의 미켈란젤로 카라바조까지 다 담았다
제리코는 많은 작품을 남기지는 않았다. 그는 젊은 나이에 말에서 떨어져서 생을 마감한 비운의 화가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가 후대에 알려진 이유는 3가지 정도 그의 주요 작품때문인데 그 중에서도 메두사호의 뗏목은 정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이 그림을 보면 낭만주의적 영감이 반영되어 있다. 사실적인 묘사이긴 하나 제리코의 상상력이 발휘되어 색채와 분위기를 매우 중요시 한 작품이고 중세적인 느낌도 담겨져 있다. 또한 미켈란젤로의 조각처럼 그림에 표현된 인물들의 근육들을 보면 인체가 정말 세밀하고 완벽하게 표현되어 있다. 거기에 더해 카라바조를 생각하게끔 만드는 명암의 표현까지 작품에 하나하나 표현되어 있다. 후대 낭만주의 화가들은 이 모든게 다 담긴 제리코의 작품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후대 낭만주의는 나만보면 된다 제리코
아무래도 많은 기법을 담아낸 낭만주의 화가 작품이기에 후대 낭만주의자들은 제리코가 그린 이 그림을 통해 큰 영향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제리코는 서른 세살에 요절한 비극적인 개인사의 주인공으로 알려져 있다. 그 이유는 외모에 꽤나 신경을 쓰는 댄디보이였고 동시에 위험한 것을 도전하며 힘을 과시하기도 좋아하는 남자였다고 한다. 또한 숙모와의 부적절한 관계를 통해 사생아를 두었고, 우울증과 자살시도, 중병을 겪고 파산까지 했던 화가였으니 충분히 그렇게 이야기 할 만하다. 제리코는 신흥 엘리트 부르주아 계급에 속한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변호사이고 어머니는 담배제조업 종사 집안 출신이었다. 아버지가 어머니쪽 회사 일을 하게 되며 사업은 번창했고 제리코는 명문 귀족학교에 다녔다. 군대를 가야할 때에는 대신 갈 사람을 사고 귀족 자제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살았다. 그는 10대 때 어머니가 20대 때 외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평생 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만큼 자본력도 갖추게 된다. 다만 낙마사고와 투자의 실패 그리고 종양으로 인해 죽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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